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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리차드 3세’ 정은혜 “매번 새로운 고전과의 만남, 외면한 것들 되돌아보죠”
국립창극단 출신 소리꾼, 미치광이 ‘마가렛 왕비’役 맡아 신선함 더해
 
양승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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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리차드 3세(연출 서재형)’에서 마가렛 왕비 역을 맡은 배우 정은혜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만났다.(뉴스컬처)     ©윤현지 기자
 
“피로 얻은 것은 피로 잃고 말 것이다.” 권력에 눈이 멀어 형제와 신하의 목숨을 끊어놓는 왕을 향해 한 여인이 저주를 퍼붓는다. 원망과 분노가 가득한 목소리 안에는 분명 ‘한(恨)’이 담겨 있다. 서양 대표 작가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지극히 한국적인 감정인 한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이는 소리꾼 정은혜가 내뿜는 특유의 색채와 멋 덕분이다.
 
지난 6일 개막한 연극 ‘리차드 3세’에서 ‘마가렛 왕비’ 역을 맡은 정은혜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앞서 국립창극단 단원으로 활동 당시 창극 ‘메디아’를 통해 서재형 연출과 맺은 인연이 이번 작품으로 이어졌다. 그는 “2013년 입단한지 5개월 정도 됐을 때 서 연출님께서 저를 믿고 ‘메디아’의 주역을 맡겨 주셨다. ‘소리꾼’이 위에 ‘배우’라는 수식어를 얹어주셨는데, 이번에 정극까지 맡겨주셔서 무대에서 더 잘 살아보자는 마음으로 보답하려 한다”고 말했다.
 
‘리차드 3세’는 신체적 콤플렉스를 뛰어넘는 언변과 권모술수, 유머감각을 지닌 ‘리차드’가 친족과 신하를 전부 숙청하고 권력의 정점에 서는 과정을 그린다. 극 중 정은혜는 리차드가 속한 왕가 요크가에 의해 남편이 죽고 가문까지 몰락당해 미치광이로 전락하는 ‘마가렛 왕비’ 역을 맡았다.
 
▲ 연극 ‘리차드 3세(연출 서재형)’ 공연 장면 중 광인이 된 마가렛 왕비(오른쪽, 정은혜 분)가 리차드에 대한 저주를 퍼붓고 있다.(뉴스컬처)     ©사진=샘컴퍼니

정은혜는 “앞서 ‘레이디 맥베스’에 출연했고 익숙한 4대 비극과 달리, 이번 작품은 어려운 문장들이 많아서 번역서를 읽는데도 정말 힘이 들었다. 다행히 한아름 작가님께서 흥미로우면서 쉽게 풀어주신 덕분에 각색된 대본으로 연습을 하면서 ‘왜 이렇게 재밌지?’라고 생각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다행히 관객들 반응도 정말 뜨거운데 첫 공연 때 전원 기립을 해주시는 걸 보면서 ‘우리가 오랜 시간 공을 들인 작업이 잘 전달됐구나’하는 감격이 컸다. 어떤 관객 분께서 ‘숨 죽여 보느라 커튼콜 때 일어나지도 못했다’고 쓰신 리뷰를 봤는데, 배우들만큼이나 관객들도 100분간 극 안에 함께 빠져 있다는 게 가장 감사하다”고 이야기했다.
 
부스스한 머리와 새카만 옷을 입고 유령처럼 성 안을 떠돌아다니는 마가렛 왕비는 리차드가 악행을 일삼을 때마다 울분에 찬 악담을 쏟아낸다. 그는 “남편과 자식을 잃고 노쇠해진 여인을 표현하기 위해 낮은 음으로 목소리를 내고, 걸음걸이도 천천히 걸으려 했다. 인간 정은혜로서는 리차드의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지만, 무대에서는 ‘아이엠 마가렛’이라고 마음을 다잡고, 리차드와 대비되는 에너지를 주고 받는다”고 말했다.
 
▲ 정은혜는 마가렛 왕비의 강렬한 분장에 대해 “일상 속의 나는 그저 평범한 사람인데, 무대 위에서 어떤 캐릭터로 관객들에게 다가갈 때는 참 멋진 것 같다. 지금 마가렛의 분장이 극에서 존재감을 발휘할 수 있는 최고의 모습이기 때문에 나는 너무 좋다. 오히려 ‘오늘 분장이 너무 깔끔하다, 머리가 더 누덕해야 한다’고 이야기할 정도다”라며 웃었다.(뉴스컬처)     ©윤현지 기자

“리차드 대사 중 ‘깎아지는 절벽 위에서 바다를 향해 원망을 쏟아내는 소년처럼, 가시 덤불속에서 필사적으로 길을 찾는 소년처럼’이라는 대목이 있어요. 심신이 나약한 소년의 결핍이 악한 형태로 비틀어져 나오는 것이죠. 하지만 마가렛은 리차드 뒤를 계속 따라다니면서 귓전에 저주를 퍼부을 수밖에 없어요. 저희끼리 농담 삼아 ‘리차드 스토커’라고 하는데, 역할간 긴밀한 상호작용을 위해 상대 역의 대사까지 파악하려 하고 있어요.”
 
리차드를 가까이에서 보는 만큼, 정은혜는 리차드 역을 맡은 선배 황정민에 대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리차드의 대사가 워낙 방대하고 연기할 때 신체적·정신적으로 힘든 부분이 많은데, 황정민 선배님이 연기하는 걸 보고 있으면 경이롭고 숭고한 느낌이 든다. 마치 소리꾼이 오랜 시간에 걸쳐 판소리를 완창을 하는 느낌인데, 원 캐스트로 30회 동안 매일 반복한다고 생각하면 어마어마하다. 무대에서 오롯이 리차드로서 살아 있는 모습을 이제 몇 회 못 본다고 생각하면 벌써부터 아쉽다”며 진심을 드러냈다.
 
7살 때 소리꾼의 길에 발을 들인 이후 30년 가까이 전통을 익히고 전해온 정은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통’이 주는 힘을 이번 작품을 통해서도 느끼고 있다. 그는 “영국의 고전을 만나는 일 또한 그 깊이를 알아간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았다. 고전이 주는 동시대적 통찰력은 알면 알수록 새로워서 앞으로도 늘 목마르고 궁금할 것 같다”고 답했다.
 
▲ 정은혜는 “재주 있는 사람이 어떤 장르 안에서 제약을 두는 것보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자기 영역을 넓혀가는 것이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경우 ‘소리’라는 근본을 잊지 않고, 여러 작업을 통해 다시 본질을 알아가는 과정으로 삼고 싶다. 현재 박사 과정 중인데 스승님께서 ‘깨달으면 나누고, 배워서 남주라’고 말씀해주신 것처럼, 나중에 후배들에게 내가 쌓은 경험들을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뉴스컬처)     ©윤현지 기자
 
‘이번 ’리차드 3세‘ 역시 현 한국 사회에 통하는 메시지를 던진다. 마가렛이 리차드 가문을 향해 ‘그대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아는가, 그대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아는가’라고 외치는데, 한 관객이 최근 사회 곳곳에서 특히 공연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두운 사건에 대한 메시지처럼 들린다고 평한 것이 한 예다. 또한 리차드가 ‘나의 죄를 묻는 그대들의 죄를 묻는다’고 되받는 대사 역시 각자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작품 속에 워낙 명대사가 많아서 매번 와 닿는 부분이 달라요. 마가렛이 리차드에게 ‘네가 외면한 것들’에 대해 상기시키는 씬이 있는데 그동안 잊고 지냈던 것, 외면하고 묵인하고 방관했던 것, 스스로 양심을 저버렸던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해요. 저를 포함해 요즘 세상 사람들이 쉽게 외면하는 것들이 많잖아요. 타인의 삶은 물론 스스로 세워둔 가치를 무시하고 좀 더 쉬운 길을 선택하기도 하죠. 리차드에게 던지고 있지만, 사실은 나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아요.”
 
지난 2012~2014년 약 3년간 국립창극단에서 활동한 정은혜는 ‘단테의 신곡’ ‘메디아’ ‘숙영낭자전’ ‘장화홍련’ ‘변강쇠 점찍고 옹녀’ 등 굵직한 창극에서 주역으로 활약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작업들이 많았고, 한 단체 안에서 활동을 이어가기에는 자유로운 영혼이라 극단 밖에서 활동 중이다. 앞으로는 한국적 소리를 기본으로 소리꾼, 배우라는 수식어를 떠나 그저 정은혜로서 관객과 소통할 수 있는 일을 전방위적으로 해보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프로필]
이름: 정은혜
직업: 소리꾼, 배우
학력: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수상: 제42회 전국대사습놀이 전국대회 판소리 명창부 차하(2016), 21세기를 빛낼 우수인재상 대통령상(2002), 제17회 동아국악콩쿠르 판소리부문 학생부 특상, 금상(2001) 외
출연작: 공연 ‘단테의 신곡’, ‘메디아’, ‘숙영낭자전’, ‘장화홍련’, ‘변강쇠 점찍고 옹녀’, ‘다른 춘향’, ‘레이디멕베스’, ‘리차드 3세’ 외
 
(뉴스컬처=양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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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희 기자
뉴스컬처/공연문화팀장
yang@newsculture.tv
 
2018/02/24 [09:33] ⓒ 뉴스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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